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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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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고려 시대에 제작된 높이 7.54m의 7층 화강암 석탑이다. 고려 석탑의 양식을 잘 보여주며 웅장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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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일반 정보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이름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
영문 이름Seven-story Stone Pagoda from Namgyewon Temple Site, Gaeseong
국가대한민국
유형국보
지정 번호100
지정일1962년 12월 20일
시대고려시대
소유자국유
주소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국립중앙박물관 (용산동6가)

2. 역사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원래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의 남계원南溪院한국어 절터에 세워졌던 고려 시대의 석탑이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면서도 세부적으로는 퇴화된 우주의 모각이나 두꺼운 추녀, 낙수면 전각부의 반전 등 고려 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

1915년 일제강점기에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이후 원래 위치에서 발견된 기단부 잔석과 함께 1990년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으로 이전되어 복원되었다. 탑을 옮기는 과정에서 탑신부에서 고려 충렬왕 때 제작되어 1283년 탑 중수 시 넣은 것으로 추정되는 《감지은니묘법연화경》 7축이 발견되었다. 이는 탑의 건립 및 중수 시기를 짐작하는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한때 탑이 있던 자리가 개국사開國寺한국어 터로 잘못 알려져 '개국사탑'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연구를 통해 남계원 터임이 밝혀지면서 현재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석탑은 웅장한 기풍과 정제된 수법을 보이는 고려 시대 석탑의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2. 1. 건립 및 원 위치

이 탑은 원래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에 있던 남계원 절터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1915년에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서울 경복궁 안으로 옮겨졌다. 이후 원래 위치를 다시 조사하는 과정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이중 기단의 일부 돌들이 발견되었고, 이 돌들도 경복궁으로 옮겨져 탑신부 옆에 따로 놓여 있었다. 시간이 흘러 1990년에 이르러 흩어져 있던 기단부와 탑신부를 합쳐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였고, 위치도 경복궁에서 현재의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으로 다시 옮겨졌다.

탑의 건립 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는 1915년 탑을 경복궁으로 옮길 때 탑신부에서 발견된 7축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이다. 이 경전은 고려 제25대 왕인 충렬왕(忠烈王)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특히 충렬왕 9년인 1283년에 탑을 수리하면서 탑 안에 넣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이 석탑이 고려 중기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 경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편, 탑이 원래 있던 개성시 덕암동 터는 과거 개국사(開國寺)라는 절의 터로 잘못 알려져서 탑의 이름도 '개국사탑'으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연구를 통해 개국사 터는 다른 곳에 있으며 이곳은 남계원 터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탑의 이름도 현재와 같이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2. 2. 일제강점기 이전 및 복원

원래 소재지는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德岩洞한국어) 남계원(南溪院한국어) 절터였으나, 1915년 일제강점기에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이후 원래 위치를 다시 조사하는 과정에서 땅속에 묻혀 있던 이중 기단부의 나머지 돌들이 발견되어 추가로 옮겨져 탑신부 옆에 놓였다. 1990년에 이르러 원래 모습대로 복원되었고, 경복궁에서 현재 위치인 국립중앙박물관 정원으로 다시 이전되었다.

1915년 탑을 경복궁으로 옮길 당시 탑신부에서 7축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한국어)이 발견되었다. 이 경전은 고려 제25대 충렬왕(忠烈王한국어)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충렬왕 9년(1283년)에 탑을 보수하면서 넣은 것으로 보인다. 이 유물 덕분에 탑의 건립 연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현재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한편, 탑이 있던 자리가 과거에는 개국사(開國寺한국어) 터로 잘못 알려져 한때 '개국사탑'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연구를 통해 실제 개국사 터는 다른 곳이며 이곳은 남계원 터임이 밝혀지면서 탑의 이름도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으로 바로잡히게 되었다.

2. 3. 사경 발견과 건립 시기 추정

1915년 탑을 경복궁으로 이전할 때 탑신부에서 7축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다. 이는 탑의 건립 연대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 사경은 고려 제25대 왕인 충렬왕(忠烈王) 때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충렬왕 9년(1283년)에 탑을 중수하면서 봉안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이 《감지은니묘법연화경》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이 발견을 통해 남계원 칠층석탑은 통일신라 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세부적으로 고려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는 고려 중기 석탑으로 판단할 수 있다.

3. 특징

높이 7.54m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고려 시대 7층 석탑으로, 고려 석탑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전체적으로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면서도 세부적으로는 고려 시대의 특징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몸돌 모서리기둥(우주) 표현의 간략화, 지붕돌(옥개석) 받침 수 감소, 두꺼워진 처마 끝(추녀)의 반전(反轉) 등은 통일신라 석탑과 구별되는 고려 석탑의 중요한 특징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어우러져 통일신라 석탑의 경쾌함과는 다른, 웅장하면서도 정제된 조형미를 보여준다.

3. 1. 구조 및 양식

높이 7.54m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고려 시대 7층 석탑이다. 고려 석탑 양식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웅장한 기품을 지니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2층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신라 석탑의 전형적인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세부적으로는 고려 시대의 특징적인 변화를 함께 보여준다. 기단부는 하층 기단 면석이 높고 상층 기단이 상대적으로 낮은 모습을 보이며, 탑신부는 몸돌의 모서리기둥(우주) 표현이 간략화되고 1층 몸돌에 문짝 모양(문비)이 새겨진 점이 특징이다. 지붕돌(옥개석)은 받침 수가 3단으로 줄고 처마 끝(추녀)이 위아래로 살짝 들려 올라가는 반전(反轉) 형태를 보이는데, 이는 통일신라 석탑과 구별되는 고려 석탑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탑 꼭대기의 상륜부는 현재 노반(露盤)과 복발(覆鉢) 부분만 남아 있다.

1915년 탑을 경복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탑신부에서 7축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이 발견되었다. 이 경전은 고려 충렬왕 9년(1283년)에 탑을 중수하면서 넣은 것으로 추정되어, 탑의 건립 시기는 이보다 앞선 고려 중기로 여겨진다.

이 석탑은 신라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적인 특징을 잘 융합하여 웅장한 기풍과 정제된 수법을 보여주는 고려시대 석탑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3. 1. 1. 기단부

이 탑은 2층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린 고려 시대의 일반적인 석탑 양식을 따른다. 전체적으로는 신라 석탑의 형식을 계승한 듯 보이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양식 변화가 나타난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돌 부재로 짜 맞춰져 있으며, 현재 몇 개는 없어진 상태이다. 하층 기단의 면석(기단의 각 면을 막는 넓적한 돌)은 신라 시대 석탑보다 훨씬 높아진 반면, 상층 기단은 상대적으로 낮아진 모습이다. 탑신부에 비해 기단부의 훼손 상태가 더 심하다.

상층과 하층 기단의 갑석(기단 맨 위를 덮는 돌)은 전체가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다. 이 때문에 현재는 하층 기단 면석과 상층 기단 사이, 원래 하층 기단 갑석이 놓여야 할 자리에 상·하층 기단 갑석을 함께 놓았다. 상층 기단의 갑석은 비교적 세련된 모습을 보인다.

원래 탑은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의 남계원 절터에 있었으나, 1915년 일제강점기에 기단부를 제외한 탑신부만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이후 원래 위치를 다시 조사하는 과정에서 땅속에서 이중으로 구성된 기단부의 남은 돌들이 발견되어 추가로 옮겨졌고, 한동안 탑신부 옆에 따로 놓여 있었다. 1990년에 이르러 기단부와 탑신부를 합쳐 원래 모습대로 복원하면서 경복궁에서 현재 위치인 국립중앙박물관 야외 정원으로 다시 이전되었다.

3. 1. 2. 탑신부

탑신부는 몸돌인 옥신(屋身)과 지붕돌인 옥개석(屋蓋石)을 각각 하나의 돌로 구성하였다. 각 층 옥신에는 양쪽에 모서리기둥인 우주(隅柱)가 새겨져 있으나, 그 표현이 얕아 신라 시대보다 퇴화된 양상을 보인다. 특히 7층의 옥신 중 1층 옥신의 북쪽 면에만 문짝 모양인 문비(門扉)가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이 문비는 양쪽 우주 사이에 두 겹의 사각형 테두리로 표현되었다.

옥개석은 각 층이 모두 동일한 수법으로 만들어졌다. 옥개받침은 각 층 모두 3단씩 낮게 조성되었고, 옥개석 윗면에는 별도의 받침돌 없이 바로 위층의 옥신을 받치고 있다. 지붕의 경사면인 낙수면(落水面)은 완만한 기울기를 이루지만, 아랫면의 받침부가 낮아 다소 무겁고 중후한 느낌을 준다. 처마 끝인 추녀(樞檐)는 두꺼우며, 추녀 끝부분인 전각부(轉角部)에 이르러서는 윗면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다가 살짝 들리는 것처럼 아랫면도 함께 들려 올라가는 반전(反轉)을 보인다. 이는 통일신라 시대 석탑에서는 보기 어려운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적인 양식이다. 이 때문에 통일신라 석탑의 경쾌함과는 달리 다소 무거운 인상을 줄 수 있으나, 전각부의 반전이 이러한 느낌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탑의 꼭대기 부분인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한 개의 돌로 만들어진 노반(露盤)과 복발(覆鉢)만이 남아 있을 뿐, 그 이상의 부재는 남아있지 않다.

한편, 1915년 탑을 경복궁으로 옮길 당시 탑신부에서 7축의 《감지은니묘법연화경》(紺紙銀泥妙法蓮華經)이 발견되었다. 이 경전은 고려 제25대 충렬왕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충렬왕 9년(1283년)에 탑을 중수하면서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발견을 통해 탑의 건립 연대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현재 이 경전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3. 1. 3. 옥개석

각 층의 옥개석은 동일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옥개받침은 각 층 모두 3단으로 낮게 조성되었으며, 옥개석 윗면에는 별도의 굄돌 없이 바로 위층의 탑신(옥신)을 받치고 있다. 낙수면은 완만한 기울기를 이루지만, 아랫면의 받침 부분이 낮아 다소 중후한 느낌을 준다. 추녀는 두꺼운 편이며, 전각부(추녀 끝이 들린 부분)에 이르러 윗면과 아랫면이 모두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살짝 들려 올라가는 반전(反轉)을 보인다. 이는 통일신라 시대 석탑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고려 시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러한 두꺼운 추녀와 낮은 받침은 탑에 다소 무거운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전각부의 반전이 이를 완화시켜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3. 2. 상륜부

상륜부는 탑신 정상에 한 개의 돌로 조성된 노반과 복발만이 남아 있을 뿐, 그 이상의 것은 현존하지 않는 상태이다.

4. 의의 및 평가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은 웅장한 기풍과 정제된 결구수법을 보이는 고려시대 석탑의 대표작이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따르고 있는 듯 보이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뚜렷하게 나타낸다. 예를 들어, 각 층 옥신에 새겨진 우주 (건축)의 표현이 간략화되어 퇴화된 모습, 옥개석의 추녀가 두꺼워진 점, 낙수면 전각부(모서리)의 위아래가 살짝 들려 반전되는 기법 등은 통일신라 석탑에서는 보기 어려운 고려시대만의 특징이다. 이러한 양식적 특징을 통해 이 탑은 고려 중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1915년 탑을 경복궁으로 이전할 때 탑신부에서 7축의 《감지은니 묘법연화경》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고려 충렬왕 9년(1283년)에 탑을 중수하면서 넣은 것으로 추정되어 탑의 연대를 짐작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이 경전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한편, 이 탑이 원래 있던 경기도 개성시 덕암동 자리는 과거 개국사(開國寺) 터로 알려져 탑의 이름도 '개국사탑'으로 불렸으나, 이후 연구를 통해 그곳이 남계원 터임이 밝혀지면서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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